202호
35쪽 그의 선발을 주도한 것은 지사장이지만 동료들은 지사장에게 화를 내기보다 선발된 그를 열렬히 비난하는 쪽을 택했다. 지사장의 지시에는 여전히 고분고분했고 사소한 농담에도 크게 웃음을 터뜨렸으며 점심시간이면 지사장의 취향에 맞춰 메뉴를 선택했다. 반면에 그는 파견 대상자로 선발된 후 약품 제조 및 적용 실험에 있어서 동료들의 작은 협조도 얻을 수 없었으며 어떤 정보도 듣지 못했고 식사 회합에서 제외되었으며 농담에도 끼어들지 못했다. 근무 개시가 몇 번에 걸쳐 미뤄지면서 결국 없던 일처럼 되어버린 후에도 그는 직원들이 두 명 이상만 휴게실에 모여 있으면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난 듯 되돌아 나왔고 커피를 뽑으러 자판기 앞으로 갔다가 누군가 있으면 아래층 자판기를 이용했으며 동기 모임에도 나가지 않았다. ..
104쪽 오무사 할아버지가 죽고 나면 전구는 다 어떻게 되나. 그가 없으면 도대체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누가 알까. 오래되어서 귀한 것을 오래되었다고 누가 모두 버리지는 않을까. 오무사에 다녀오고 나면 이런 생각들로 나는 막막해지곤 했는데, 수리실을 찾아오는 사람들 중엔 수리실과 여 씨 아저씨를 두고 이것과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서 나는 그때마다 수리실의 내력을 생각해 보고는 했다. 어느 날 전구를 사러 내려갔더니 노인도 선반도 없었다. 텅 비어서, 어두운 벽만 남아 있었다. 돌아가셨구나. 하고 생각했다. 수리실로 돌아가서 소식을 전하자, 오무사 노인이 돌아가셨나 보다고 여 씨 아저씨도 한동안 착잡한 기색이었다. 사고자 했던 전구는 더는 재고가 없던 것이라 이 전구가 필요한 수리는 하지 못..
98 막스 데미안에 대한 나의그리움이 다시 거세졌다. 나는 그의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몇 해째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꼭 한 번 방학 때 그를 맞닥뜨렸다. 이 짧은 만남을 기록에서 일부러 빠뜨렸다는 것을 지금 알겠다. 그것이 부끄러움과 허영심에서 일어난 일이었다는 것도 알겠다. 만회해야겠다. 99 내가 그에게 몇번 편지를 썼는데 답장을 못 받았던 생각이 났다. 아, 그가 그것도 잊어버렸으면 좋을 텐데, 그 어리석고 창피한 편지들을! 편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103 데미안에게 편지 쓰는 일은 나로서는 불가능했던 것 같다. 설령 어디로 보내야 하는지 알었더라도 말이다. 내가 매사를 처리했던 방식처럼 꿈같은 예감에 사로잡혀, 그림이 그에게 닿든 안 닿든 간에 매를 그린 그림을 보내기로 결정..
9쪽 사람은 스스로가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한다. 자기 자신에게 익숙해진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이다. 세월이 갈수록 인간이란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그 인물을 저점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낯설게 느껴진다고 한들 무슨 불편이 있을 것인가? 그 편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알게 되면 혐오감에 사로잡힐 테니까. 13쪽 마침내 나는 내 전체를 온전히 쥘리에트에게 바칠 수 있게 되었다. 으로 이사 온 후 처음 며칠 동안 우리가 무엇을 했던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너무나 하얗고 조용한 나머지 자주 걸음을 멈추고 어리둥절한 태도로 서로를 마주보았던, 숲으로 산책을 몇 번 나간 것 외에는. 15쪽 으로 이사 온 지 일주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