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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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와 빨강> 편혜영

고징니 2018. 1. 29. 18:03











35쪽
그의 선발을 주도한 것은 지사장이지만 동료들은 지사장에게 화를 내기보다 선발된 그를 열렬히 비난하는 쪽을 택했다. 지사장의 지시에는 여전히 고분고분했고 사소한 농담에도 크게 웃음을 터뜨렸으며 점심시간이면 지사장의 취향에 맞춰 메뉴를 선택했다. 반면에 그는 파견 대상자로 선발된 후 약품 제조 및 적용 실험에 있어서 동료들의 작은 협조도 얻을 수 없었으며 어떤 정보도 듣지 못했고 식사 회합에서 제외되었으며 농담에도 끼어들지 못했다. 근무 개시가 몇 번에 걸쳐 미뤄지면서 결국 없던 일처럼 되어버린 후에도 그는 직원들이 두 명 이상만 휴게실에 모여 있으면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난 듯 되돌아 나왔고 커피를 뽑으러 자판기 앞으로 갔다가 누군가 있으면 아래층 자판기를 이용했으며 동기 모임에도 나가지 않았다.




82쪽
애처로움에도 불구하고 가슴을 관통하는 통증을 느낄 수 없어서 그는 곧 이 연민이 과장된 것임을 깨달았다. 그가 진심으로 애달파하는 것은 전처의 삶이 아니라 그녀로 인해 외로워진 자신의 삶이었다.



167쪽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과거의 시간이었다. 현재는 버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미래는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방대해서 멀고도 멀었다. 어차피 그가 미래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그것이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라는 것뿐이었다. 석유처럼 검은 하수를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이 언제나 제 할일을 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시간은 진창 속에 빠져 있기도 하고 오물과 섞이느라 더디 흐르기도 한다. 그러니 미래는 아예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재와 빨강> 편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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